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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잘하는 과목이 무엇이니?”라는 질문을 누군가가 저에게 물어봤을 때 항상 제일 먼저 생각났던 대답은 바로 “일단 수학은 아니에요”였습니다.
국제 학교를 다니면서 많은 과목을 들어보았지만 단 한 번도 수학과 과학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어릴 때부터 제 스스로를 문과라고 생각하며 도전조차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좋은 수학 성적을 받을 수 있던 이유는 오로지 어릴 때 했던 한국 수학의 선행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수학에 대한 흥미와 관심 없이 기억으로만 수학을 풀던 저는, 10학년을 올라가기 전 서울에서 우연히 모의 SAT II Maths 2C 시험을 치습니다.
결과는 25/50. 정확히 반 타작이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아무런 감정이 없던 수학에게 두려움이 생겼고, 자신 없는 것은 안 하던 성격인 저는 수학을 더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0학년이 되고 SAT subject 시험을 봐야 한다는 압박감과 친구들의 권유로 처음 유학 솔루션에서 Maths 2C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첫 수업에서 선생님이 제게 하셨던 말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바로 “수학을 기억하려고 하지 마, 지원아”라는 말이었습니다.
문제를 풀면서 ‘아, 풀어본 적 있던 문젠데’ ‘공식이 뭐였더라’라는 생각을 하며 풀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고 제 스스로도 많이 놀라고 자신에게 실망하였습니다.
하지만 두 달 남짓 정도 되는 기간 동안 수업을 들으면서 저는 많이 변화할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선행으로 쌓아져 있던 수학적 지식을 버리고 새롭게 생각하는 방법을 배웠으며, 모르는 문제를 봐도 겁부터 먹던 모습이 점점 사라져갔습니다.
자연스레 다른 학생들을 도와줄 수 있었고,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수학이 재밌다고 느끼는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저는 Maths 2C 시험에서 800점 만점을 받고 끝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 점수보다 선생님의 수업이 저에게 준 영향 중 가장 감사한 것이 있다면, 수학이 얼마나 재미있는 학문인지 알려주셨다는 것입니다.
수학은 연습량이다, 무조건 참고서를 많이 풀어봐라,라는 말을 듣고 컸던 저에게 수학이 생각하는 것이며, 이야기와도 같은 것이고, 배우면 까먹지 않고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과목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지금 저희 학교에서 모두가 피하고자 하는 Calculus BC 과목을 들으면서도 그때 느끼고 배운 감정 하나로 즐겁고 행복하게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여덟 과목 중 수학 수업이 제일 재밌다는 말이 제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불과 이번 연도 4월까지 상상하지도 못했을 일입니다.
수학 개념, 문제를 푸는 요령, 그 외에도 많은 것을 저에게 가르쳐 주셨지만, 제가 선생님께 가장 감사드리는 것은 수학에 대한 사랑입니다.
AP Cal 박원상 원장 선생님과 언제부턴가 내 안의 시계가 조금씩 빨리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자, 나는 다급해졌다.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던 나한테, 누군가 현실적인 조언과 구원을 동시에 해주었다.
나는 급히 1학기 수학 기말고사를 봐야 했고, 암시했듯이 많은 준비를 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늦지 않았다고 얘기해 주신 선생님이 있었고, 나는 기말고사를 반에서 일등을 하였다. 그 일은 나에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가능성이라는 게, 수학이라는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데 참 신기하게도 할 일들을 하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 후 계속 찾아왔다. 밤늦게 공부했지만 딱히 불만은 없었다. 내가 그곳에 있는 것은 나의 선택이었다.
내가 남기로 결심했고, 남기로 결심한 이상 난 공부를 해야 했다.
수업 시간은 정말로 도전적이었고, 어떤 의미로는 빛이 났다. 선생님께서는 빛이 나셨다.
수학을 전혀 다른 식으로 풀어나가는 방식은 처음에는 단순히 새롭고 신기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빛이 났다.
수학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모습들이 내가 읽어왔던 책들과 고전이랑 다르지 않았다.
수없이 정교한 장치들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이야기. 그것은 수학이었고, 하나의 세계였다.
한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은 나의 세계가 커져감을 의미했다.
그렇게 언제부턴가 수학이 재미있기까지 했다. 이제는 수업이 끝났고, 이젠 혼자 걸어가야 한다.
아직도 선생님이 누누이 강조하셨던 우리 스스로 걸어나간다는 약속을 나는 아직 지켜내지는 못했다.
그래도 나는 꼭 증명해야 한다.
내가 선택했던 길과 방식이 틀리지 않았음을, 그렇게 언젠간...... 어제보다 더 멀리, 그리고 더 높게 손을 뻗을 거다.
선생님이 얘기해 주신 대로.
진심으로 말씀드릴게요. 성적과 관계없이 마음이 꽉 차는 수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열정적이셨고, 저희로 하여금 포기라는 단어를 함부로 입에 못 올리게 만들어 주신 것 같아요.
참 오랜만에 수학이 즐겁다고 느낀 수업들이었습니다.
정말로 저희 학교로 전근 와주셨으면 할 정도라니까요. 그냥 즐거웠고, 즐거웠고 즐거웠어요.
그래서 다시 들으라고 하면 군말 없이 돌아올 것 같습니다.
뒤돌아 봤을 때 한 번도 운적 없는 매일 웃기만 한 가치 있는 수업이었다고 당당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원장 선생님!
저는 수학을 못하는 아이였습니다. 아니, 못하고 잘하고를 떠나서 수학에 대한 자신감이 전혀 없었습니다.
워낙 꿈이랑 관심사가 명확히 문과 쪽이라 그런 것도 있었지만 그냥 “수학” 하면 “못하는 과목”, “발목 잡는 과목”이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런 제가 준비도 제대로 안된 채로 올해 AP Calculus을 수강하게 되었고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보는 테스트, 퀴즈마다 족족 F였고, 잘 본 점수라고 해 봤자 C였습니다.
그렇게 AP Cal 때문에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중 박원상 원장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수학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학원들을 몇 차례 다닌 경험이 있지만 단 한 번도 도움이 크게 되었다고 느낀 적이 없는지라 수학학원에 대한 환멸을 워낙 크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박원상 선생님께서는 다르시다는 것을 첫 수업부터 알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원장 선생님께서 얼마나 이 Calculus라는 학문이 인류에 있어서 중요한지에 대한 설명을 해 주셨던 게 정말 좋았습니다.
철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수학이라는 학문이 우리가 배우는 것들의 기초가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흥미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선생님 특유의 수업방식도 정말 신선했습니다.
“초딩 5학년 mind set으로 문제들을 approach” 하라고 하시며 공식들과 기교를 가르쳐 주시기보다는 기본 개념과 원리를 확실하게 가르쳐 주시고 그것으로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도록 가이드해 주시니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려운 문제를 풀 때 항상 선생님께서는 바로 답을 알려주시기보다는 내 실력으로 충분히 풀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셨고 스스로 푸는 습관을 들이다 보니 어느덧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A+로 학교 성적도 올랐습니다.
아직도 AP Calculus에서 첫 A+을 받았던 날이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박원상 원장님께서는 실로 저에게 수학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도와주시고 자신감을 심어주신 분이십니다.
저는 아직도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박원상 유학솔루션의 문을 두드리던 그날이 생각납니다.
유학 생활을 한 번도 한 적은 없지만 막연하게 미국에서 내 꿈을 펼치고 싶다는 희망을 안고 시작한 긴 여정에 원장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정말 아찔합니다.
영어도 서툰 탓에 기도 죽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굉장히 많았지만,
그때마다 격려해 주시고, 포기하지 말라고 꿈을 심어주시고, 길을 보여주셔서,
대학을 졸업한 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선생님의 인생이 녹아든 지혜의 한마디가 저를 이끌어주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지식을 알려주실 수 있는 분은 많을지 몰라도,
사랑으로 학생들을 보살펴 주시고, 창의적인 사고와 담대한 마음으로 삶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심어주실 수 있는 분은 많지 않다고 자신합니다.
선생님께서 고등학교 때 처음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를 추천해 주셨는데, 책 속의 이 구절이 선생님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The teacher who walks in the shadow of the temple, among his followers, gives not of his wisdom but rather of his faith and his lovingness.
If he is indeed wise he does not bid you enter the house of his wisdom, but rather leads you to the threshold of your own mind.
선생님,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어느덧 한 학기가 훌쩍 지나버렸다.
지금 이렇게 도서관의 구석진 책상에 앉아 정신없이 기말고사 준비를 하면서도, 내가 이곳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것이 여전히 꿈만 같다.
어려서 부모님을 따라 이 대학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나도 언젠가 이런 곳에서 공부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곤 했지만 그것은 어린 시절의 꿈이었을 뿐 그 꿈이 이루어질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과학경시대회를 준비하였던 나는, 2학년이 되면서 새로이 해외 유학에 도전해 보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막상 유학 준비를 시작하려 하니 너무나 막막하기만 하였다.
일반고를 다니던 나로서는 SAT며 AP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단지 인터넷의 몇몇 유학 준비 카페에서 얻은 정보만으로 유학 준비를 시작하였고,
주변에 상의할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이리저리 속앓이를 하며 한 학기를 보내야 했다.
그렇게 여름방학을 맞이하였고, 나는 더 이상 이렇게 혼자 준비를 하는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위험하다는 생각마저 들어 박원상 선생님을 만나 뵙기로 마음먹었다.
집이 일산이었기 때문에 학원에서 수업을 들으며 공부를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은 혼자 공부를 하고 매달 학원에 나가 시험을 보며 조금씩 실력을 키워 나가기로 하였다.
가장 자신이 없었던 Writing 수업은 고 2 겨울 방학을 이용하여 수업을 들어 많은 도움을 받았다.
고 3 때는 혼자 공부하면서 모르는 문제가 생기면 이메일로 유학 솔루션 선생님들께 여쭈고 확인하여 그때그때 모르는 부분을 짚고 넘어갈 수 있었다.
이처럼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유학솔루션의 선생님들께서 주신 도움은 무척 컸다.
하지만 더 큰 도움은 박원상 선생님께서 대학 합격자 발표 순간까지 나를 격려해 주시면서 한결같이 이끌어 주셨다는 사실이다.
주변에 같은 길을 가는 친구들 없이 혼자 유학을 준비해서 그런지 나는 너무 지치고 힘들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때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박원상 선생님께서는 내가 풀이 죽어 있을 때 나 자신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힘을 주셨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갖고 있는 장점들을 말씀하시며 해낼 수 있다고 등을 두드려 주셨고,
때로는 냉철하고 객관적인 충고로 내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최선을 다하도록 채찍도 주셨다.
내가 하버드에 합격한 뒤 선생님을 찾아뵈었을 때 선생님께서 나를 반겨 주시며 앞으로도 잘할 수 있다고 다시 힘을 주시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
이제 내가 박원상 선생님께서 주신 도움에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은
그저 묵묵히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여 내 길을 힘차게 걸어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 그만 나의 단상을 접고 다시 기말고사를 준비하기 위해 책을 펴야 할 것 같다……
프린터가 달달거리며 내 원서 종이들을 뽑아낼 때처럼, 원서 봉투에 풀칠하기 전 안을 들여다보고 또 보고 마지막 한 번 더 볼 때처럼 간절했을 때도 없었다.
지금 나는 합격수기를 쓰고 있지만 그때의 나는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발버둥 치고 있었다.
항상 유학에 대한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있던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확실하게 유학을 가기로 결정했다.
일반고에서 SAT를 준비하기는 생각 외로 힘들었다. 더욱이 해외 거주 경험이 없던 나로서는 미국 대학이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웠던 점은 나 혼자 싸워야 했다는 것. 수능을 준비하던 친구들과 다른 공부를 하고 있다는 자체는
나를 해이하게 만들었고 그것은 나를 정신적으로 엄청나게 괴롭혔다. 그때, 라디오에서 듣던 남궁연 아저씨와 닮은 선생님을 만났다.
내가 박원상 선생님 하면 떠오르는 건 목소리다. 말의 톤은 부드럽지만 비수가 박혀 있다는 것.
아플 뿐만 아니라 굉장히 정확했던 그 비수들은 한번 들으면 마음에서 빼낼 수가 없었다.
그 덕분에 나는 태평스럽고 낙천적인 성격을 잠시 뒤로하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나의 좋지 않은 SAT 성적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내가 가진 다른 장점들을 부각시키며 격려를 많이 해주셨다.
그 덕분에 나는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SAT를 열심히 봤고 점수도 거의 100점가량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해 5월, 나는 9개 대학에서 합격을 받아 그중에서 고를 수 있게 되는 분에 넘치는 행복감에 젖을 수 있었다.
내가 후배들에게, 특히 해외 거주 경험이 없는 일반고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감독하라는 것과
자신을 이끌어 줄만한 유능한 상담자를 찾으라는 것이다.
유학을 하겠다는 어려운 결심을 했다면 그때부터 벌써 남들보다 한 단계 어려운 코스를 밟는 거라고 자기와 약속을 한 거다.
그렇다면, 이왕 발을 들여놓았다면 자꾸만 해이해지는 자신을 채찍질해서 올바르게 다시 세워야 한다.
준비하는 과정이 힘들더라도 그 순간, 미국에서 미청년과 웃으며 토론할 자신을 생각해 보면 순간 잠이 번쩍 깰 것이다.
또한 모든 것을 혼자 떠맡아 하기는 힘들 것이다. 성적이 오르지 않을 때, 내 확신에 의심이 설 때,
누구도 나에게 아무런 말을 해주지 않는다면 내 스트레스는 내가 먹게 된다. 그때는 먹어도 욕을 먹는 게 낫다.
나에게 시원하게 한 마디 해 줄 사람을 찾으면 그 순간 내 갈증과 고독과 불안은 싹 해소될 수 있다.
후배들이 찾고 있던 그 사람이 학업뿐 아니라 인생의 조언자가 될 거라고 생각된다면 매달려서 놓지 말아라. 절대.
나는 아직도 미국 생활에 적응 중이지만 두 가지는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오뚝이가 되자' 와 '더 큰 오뚝이를 찾자'라는 것.
인생을 바꾸는 계기는 간이역처럼 삶의 과정 곳곳에 존재한다.
철로가 이어지는 곳이면 어디든지 잠시 머무를 수 있는 역이 존재하듯이,
삶이 지속되는 한 어디든지 그곳을 발견하고 지나온 거리와 남은 여정을 짚어 볼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목표를 만들어 가고 종착 지점까지 남아있는 시간들을 생각하면 들뜨기도 한다.
이미 입시가 끝나고 발표가 나고 있는 지금 같은 때에는 정말 오랜 여행을 끝낸 뒤, 또 다른 역에서 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여행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두 곳 미국 대학 진학을 결정할 때의 나 그리고 박원상 선생님.
유학을 결정했던 때는 고등학교 2학년 2학기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그때 이후로 International program이 없는 대구에서 혼자 책을 사서 공부하고 대학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내가 절실히 필요로 했던 것은,
나에게 유학 시험을 지도하거나 원서를 준비해 줄 누군가가 전부는 아니었다.
오히려 나에게는 앞날에 대한 불안을 느낄 때마다 내가 결정한 선택을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진정으로
나를 이해하고 격려해 줄 유능한 안내자가 너무나 필요했다. 지난 6월, 박원상 선생님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첫 만남 이후로, 선생님은 나의 유학 선배이자 인생의 상담자와 안내자로서 최선을 다해 나를 이끌어 주셨다.
수학을 너무나 싫어해서 SAT II의 수학 준비조차 힘들어했던 나는, 지금 또다시 AP 미적분학을 준비하고 있다.
선생님과 함께 했던 수학 수업 시간들은 내가 가졌던 콤플렉스를 극복하게 도와주었고,
SAT 성적이 부족해 원하는 학교에 지원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에도 에세이와 과외활동에서
내가 지닌 merit를 강조하시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나는 내가 처음 유학을 결정할 때 그렸던 바로 그 학교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작은 것일지라도 꿈이 이루어지는 것은 본인의 기도와 노력뿐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수고가 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여행은 끝나지 않았고, 앞으로는 더 힘들고 먼 길을 가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그중에도 잊지 않을 사실은 내가 장차 가치 있는 일에 헌신함으로써 선생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꿈을 현실로 가꿔가는 과정은 너무나도 달콤하고 아름답다.
중학교에서 중위권의 성적, 더없이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나에게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우연히 서점에서 본
"내 공부는 내가 한다"라는 책을 읽고 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 꿈은 한국 중학교에 다니고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던 한 아이에게는 너무나도 허무맹랑한 꿈이었다.
아이비리그의 유일무이한 경영학부, 미국 최고의 경영학부로 불리는 펜실베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게 늦은 것 같이 보였다.
조기유학의 최적기라 일컬어지는 8,9학년으로 유학할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지난 것이었고,
외고 입학의 문도 성적과 영어실력 모두 뛰어나지 않았던 나에게는 너무 높은 벽이었다.
하지만 저 꿈과 국내 인문계 고교 진학이라는 이성 사이에서 나는 과감히 꿈을 선택하기로 하였다.
10학년에 영어도 변변치 못하면서 조기 유학을 간 나는 언제나 장벽에 부딪칠 때 힘들 때마다 눈 감고 가만히 와튼에서의 내 생각을 떠올렸다.
와튼에서 세계의 비즈니스 리더들과 만나서 같이 경쟁할 생각, 와튼 후에 무한한 가능성.
그 달콤한 상상, 혹은 환상에 붙들린 나는 이를 악물고 난관을 하나하나 넘어갔다.
올해 초만 하여도, 먼저 와있던 다른 학교의 유학생들, 국내 특목고에 있던 학생들에 비하면 나는 정말 보잘 것이 없었다.
그들의 SAT score와 10개를 넘어가는 AP 숫자는 10학년 때 미국에 처음 와서 AP를 하나도 못 들은 나를 너무너무 초라하게 보이게 하였다.
모든 명문 대학의 입학 기준이 적어도 10개의 AP 4개의 SAT 2를 요구하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하였다.
11학년 때 Calculus BC와 US History, Biology 3개의 AP를 갑자기 듣기 시작한 나는
우리 학교의 전설적인 과제량에 압사할 지경이었고 GPA조차도 정말 짜게 주는 우리 학교에서 SAT, AP 등 각종 시험들과
학교 성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는 정말 쉽지 않아 보였다. 나는 모든 생각을 다 접고, 공부에만 매달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런 관리가 대학의 성공과 직결된다는 신념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저 3개의 AP 과목을 열심히 한 보람인지 AP Test에서 모두 5점을 기록하였고 관련된 SAT 2과목에서도 고득점을 올릴 수가 있었다.
12학년 때에 어려운 과목을 많이 들을까 아니면 쉬운 과목을 듣고 나머지 시간을 SAT 1 공부에 활용할까라는 선택에 직면할 때 나는 주저 없이 전자를 선택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경영이라면 문과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나는 경영학부를 지망하면서도 대학 2학년 수준의 수학인
미분방정식과 AP Physics, AP Statistics 등 이과 과목을 선택하였고 문과 쪽에서도 밸런스를 주기 위해 AP Economics를 선택하였다.
SAT 공부를 도저히 할 수 없는 빡빡한 스케줄이었지만 어려운 과목을 되도록 많이 들어
학교생활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대학 합격의 최선의 길이라고 굳게 믿기 시작했다.
나의 SAT 1점수는 썩 훌륭하지는 않았다. 나는 유펜의 와튼보다도 순위가 낮은 대학들의 합격생들보다도 낮은 점수를 받았다.
그 SAT 점수를 받을 때엔 정말 눈앞이 캄캄할 수준이었다. 나의 4년간의 와튼 드림은 그렇게 물 건너 가는가 하였다.
하지만 미국 대학 입시에서는 한국 입시와는 달리 응시자들에게 에세이라는 자기를 표현할 아주 중요한 기회를 준다.
점수 같은 수치로는 말할 수 없는 한 사람의 캐릭터와 모티베이션을 모두 드러내어서 대학을 사로잡을 수 있는 강력한 무기는 바로 에세이였다.
박원상 선생님과 유학솔루션 식구들과 에세이를 작업하기 시작하면서 정말 많은 것을 깨달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의 와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아무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서 대학을 사로잡느냐가 문제였다.
에세이 한편이 SAT 만점을 받는 것 이상의 효과를 가져다 올 수 있는 것이고 SAT 만점자와 내신이 완벽해도
자기 어필이 부족하면 Weak candidate가 돼버리는 것이다.
몇 달간에 작업 끝에 나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최적의 글이 나와줬다.
12월 14일 4시 나는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기회를 부여받았다. 4년 동안 꿈꿔온 와튼에의 입학.
꿈이 현실로 다가올 때의 그 강렬한 달콤함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지금까지 도와준 유솔 식구들과 원장님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이제 나는 아이비리그에서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할 것이고 합격에서 얻은 자신감과 경험은 더 큰 성공을 불러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사람은 꿈의 재량만큼 이룬다는 말을 익히 들었다. 이제 막 대학의 문턱에 선 학생으로서 감히 성공을 논할 수는 없겠지만,
더 큰 꿈을 향한 도약을 가능케 했던 내 꿈과 3년간의 노력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내가 처음 유학을 결심하게 된 것은 중 3 때 아주 우연한 계기에 의해서였다.
평소 즐겨 읽던 컴퓨터 잡지에서 스탠퍼드 대학에 관한 기사를 읽었는데, 실리콘밸리와 스탠퍼드의 공생관계에 관한 이야기는,
어린 마음에 컴퓨터 벤처회사 사장이 되겠다고 다짐하던 나를 흥분 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때부터 직접 미국 대학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부모님께 미국 대학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말씀드리기는 했지만, 크게 반가워하시지는 않으셨다.
외국 경험이 없는 어린 아들이 타지에서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크셨다.
학교 유학 준비반이 있긴 했지만 처음 생긴 터라 무척 열악했다. 모든 걸 혼자 준비해야 했다.
그러던 중에 옥스퍼드에서 수학하고 있는 김선 누나에게 도움을 받게 되었고, 누나의 담임 선생님이셨던 박원상 선생님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연치 않은 계기로 작년 1월 선생님을 만나 뵙게 되었다. 박원상 선생님으로부터 얻은 것은 좋은 강의를 듣고 좋은 성적을 얻은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준비에 관한 모든 것을 도와주셨고, 항상 격려와 질책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래서 선생님이 처음 내게 말씀하셨듯 선생님을 믿고 "마음 단단히 먹고 시작" 할 수 있었다.
미국 대학에 관해서 공부해 나가면서 나는 점점 내 선택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내가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미국 대학이 분명히 한국 대학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큰 차이를 깨닫지 못하고 유학 준비를 시작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미국 대학 진학을 준비하면서도 한국 입시 준비하듯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대학과 한국 대학의 가장 큰 차이는
첫째, 학문의 경계에 함부로 선을 긋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예로, 한국에서는 학문을 문과와 이공계로 나누지만, 미국의 대학은 문이계열과 공과계열로 나누면서도 둘 사이의 큰 장벽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문과이면 이과 과목들을, 반대로 이과에서는 문과 과목들을 소홀히 하기 쉽지만 미국 대학생들은 그런 구분을 두지 않는다.
나는 외고생이면서도 컴퓨터공학에 관심이 많았다, 더구나 AP 경제학과 미적분학과 같은 공부를 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경제학과 심리학, 수학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은 다빈치와 같은 르네상스맨을 양성하는 Liberal Arts College 이면서도 강한 공학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Swarthmore College에 지원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학문에는 제한이 없다. 교육 제도가 혹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어느 한 쪽으로 분류되었다고 해서 학문을 편식해서는 안 된다.
나는 유학을 준비하는 다른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자신의 흥미를 찾아 나가라고 조언하고 싶다.
학생들 해외 대학입시 지도를 하면서, 입학지원서 작성은 한국의 그것과는 다르게 성인으로서 남은 인생을 살아가기 전 지나온 날을 되돌아보고 정리하는 좋은 기회란 말을 해왔다.
대치동 중심에서 치열하게 살다 제주로 내려와 분원을 맡아 최소한의 일을 하며 살았다. 유유자적하며 행복했던 짧지 않은 시간을 뒤로하고 다시 치열함 속으로 들어가려고 준비하며 가슴엔 불이 붙고 머리는 냉철해졌으며 두 손은 불끈 쥐어져 있었다.
수많은 교육기관들 속에서 우리 유학솔루션 아카데미가 제공하는 프로그램들을 소개하는 책자를 준비하다 보니 과연 우리가 정리한 이 내용들이 진실의 양면성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까라는 생각에 한동안 진도를 못 나갔었다.
그러다 우리 유학솔루션의 자산인 지나간 학생들의 눈높이에서 우리를 평가한 가감 없는 후기를 올리기로 하면서 자료를 찾았다. 한정된 지면에 모든 자료를 다 실을 수는 없지만 훌륭한 스펙의 학생이 다소 편하게 준비해 명문대에 합격한 사례보다는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도전해서 성공한 위주로 정리해 봤다.
녀석들의 오래된 글을 읽으며 불끈 쥐었던 두 손을 풀었다. 이런 간절함이 있고 꿈을 놓지 않는 녀석들을 다시 만나러 가는데 나에게 필요한 것은 결연한 각오보다는 열린 가슴이란 것을 알게 된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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